글로벌 AI·방산 패러다임의 전환, 그리고 그 중심에 선 K-테크

지난 6월 우크라이나가 소형 드론 수백 대를 러시아 본토로 은밀히 침투시켜 40여 대의 군용기를 타격한 사건은 글로벌 방위산업의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시사하는 결정적 장면이었다. F-35와 같은 천문학적 비용의 재래식 무기 시대가 저물고, 다수의 저비용 AI 자율 시스템이 전장을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미래를 일찌감치 내다보고 시장의 혁신을 주도하는 미국의 방산 테크 기업이 있다. 바로 2017년 설립되어 이제는 ‘제2의 팔란티어’로 불리는 안두릴 인더스트리(Anduril Industries)다. 소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명검에서 사명을 따온 이 회사는 미 국방부와 호주군 등에 AI 기반 감시 타워와 드론 등 무인 시스템을 공급하며 비상장 기업임에도 무려 305억 달러(약 42조 원)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속도를 무기로 방산의 공식을 깨다

최근 한국 지사를 개설하며 공식 진출을 선언한 안두릴의 중심에는 파머 러키(33) 창업자가 있다. 19세에 가상현실(VR) 기기 제조사 오큘러스를 창업해 메타에 매각하며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그는 지난 7일 서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인터뷰를 통해 기존 방산업계와는 완전히 다른 자사만의 비즈니스 모델을 강조했다.

전통적인 방산 기업들이 정부와 계약을 맺은 뒤에야 지난한 개발 프로세스에 돌입하는 ‘하청형’ 구조에 머물러 있다면, 안두릴은 막대한 연구개발(R&D) 비용을 자체적으로 부담해 기술을 먼저 완성한 뒤 각국 정부에 도입을 제안하는 파격적인 방식을 취한다. 기술 실패의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끊임없이 반복하고 개선하는 민간 테크 기업의 DNA를 이식한 셈이다. 이들은 장기적인 계획보다 압도적인 ‘속도’를 성공의 핵심 비결로 삼아 대만군에 단 6개월 만에 무인 드론 알티우스를 공급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러키 창업자는 모든 무기 체계가 AI로 재편되는 흐름 속에서 민간의 혁신 기술이 군사 분야에 훨씬 더 공격적으로 접목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42조 방산 거물이 주목한 한국의 제조 인프라

한국을 찾은 그의 주된 목적은 명확했다. 방산, 기술, 그리고 탄탄한 제조 인프라를 모두 갖춘 한국 기업들과의 파트너십 구축이다. 이번 방한 기간 동안 HD현대, 대한항공 등 주요 기업들과 연쇄 회동을 가진 그는 군함 및 항공 분야에 포진한 한국의 묵직한 제조 기술력에 안두릴의 정교한 AI 무인 기술을 결합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안두릴의 글로벌 공급망에 얽혀있는 한국 기업들의 비중을 앞으로 더 공격적으로 늘려나가겠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첨단 기술 트렌드를 선도하는 러키 창업자의 각별한 ‘삼성 사랑’이다. 2010년 출시된 갤럭시 바이브런트를 시작으로 줄곧 삼성 스마트폰만 고집해 온 그는 현재 갤럭시 S23 울트라를 사용하고 있다. 6개월마다 새로운 전자기기를 테스트해보는 얼리어답터임에도 불구하고, 군용 야간 투시경에 버금가는 독보적인 나이트 비전(Night Vision) 기능이 오직 갤럭시에서만 제대로 구현된다는 것이 그 이유다. 오큘러스 시절부터 삼성디스플레이와 긴밀하게 협력해 온 그는 삼성을 대체 불가능한 기술 파트너로 꼽으며, 미국이 확보하지 못한 섬세한 하드웨어 기술력을 한국 업체들이 완벽하게 보완해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글로벌 자본이 베팅한 삼성의 AI 인프라 확장

러키 창업자가 삼성의 압도적인 디스플레이와 기기 하드웨어 역량에 주목했다면, 글로벌 자본 시장은 삼성이 전사적으로 사활을 걸고 있는 B2B 기반의 AI 인프라 성장성에 뭉칫돈을 던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방증하듯 수요일(현지 시각) 삼성의 IT 솔루션 및 물류 계열사인 삼성SDS의 주가는 장중 한때 21.3%까지 치솟으며 폭발적인 강세를 보였다. 종가 역시 17.89% 급등한 채 마감했다. 미국 기술주 중심의 랠리에 힘입어 모회사인 삼성전자 주가도 2.18% 상승 곡선을 그렸지만, 이날 시장을 뒤흔든 핵심 동력은 글로벌 사모펀드 KKR의 대규모 투자 소식이었다. KKR은 삼성SDS가 새로 발행하는 1조 2,200억 원(약 8억 2,000만 달러) 규모의 전환사채를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KKR 아시아 펀드 IV를 통해 진행되는 이번 거래는 올해 2분기 중으로 최종 마무리될 예정이다.

풀스택 AI 솔루션 기업으로 도약하는 K-테크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테크 기업들이 AI 인프라와 디지털 전환(DT)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붓고 있는 지금, 삼성SDS는 급증하는 AI 서비스 수요를 선점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번에 조달된 막대한 자금 역시 삼성SDS가 ‘풀스택(Full-stack) AI 솔루션’ 제공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한 인프라 투자와 글로벌 시장 확장에 고스란히 투입될 계획이다. 풀스택 AI 솔루션이란 기초적인 컴퓨터 하드웨어와 데이터 저장장치 구축부터, 기업 고객이 실제 비즈니스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구동할 수 있는 상용 AI 도구에 이르기까지 AI 시스템의 모든 단계를 일괄적으로 개발하고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파트너십은 단순한 자금 수혈을 넘어선 전략적 동맹의 성격을 띤다. KKR은 향후 삼성SDS의 인수합병(M&A)은 물론 자본 배분, AI 서비스 포트폴리오 다각화 및 글로벌 진출 전반에 걸쳐 핵심 자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준희 삼성SDS 대표는 KKR이 글로벌 자본 시장에서 축적해 온 딥테크 전문성을 지렛대 삼아 M&A를 포함한 폭넓은 성장 기회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겠다고 청사진을 밝혔다. KKR 코리아의 박정호 대표 역시 전 산업군에 걸쳐 디지털 전환 요구가 빗발치는 현 상황에서 한국의 디지털 역량 진화를 이끄는 삼성SDS의 시장 장악력에 굳건한 신뢰를 보냈다. AI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독자적인 기술력과 글로벌 자본을 양 날개로 장착한 한국 테크 기업들의 행보가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으로 펼쳐지고 있다.